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앞에 두고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 마가는 그 길목에서 길가에 앉아 있는 시각장애를 가진 거지를 등장시긴다. 그 날이 바디매오에게는 비천했던 자신의 인생에 가장 특별한 날이 되었다. 무리 중의 한 사람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고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바디매오의 마음이 움직인 것 같다. 소문으로 들었던 이름... 예수님과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더 가까이 들려오자, 바디매오가 소리를 지른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 이야기는 예수님이 이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을 선포하시고 바디매오가 예수를 길에서 따랐다는 것으로 이야기에 종결을 맺는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바디매오의 믿음이 무엇이기에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일까?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자세하게 말하지 않지만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호칭했고, 그분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 하며 메시야 그리스도 앞에 나왔다는 것이다. 당신은 우리가 그렇게 기다렸던 메시야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라는 믿음이라 할 수 있다. 더 근원적인 믿음의 성격으로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책망하자 바디매오는 더 큰 소리로 예수를 불렀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말은 귀에 더 이상 들어오지 않고 지금 내 눈 앞에 계시는 오직 한 분에게만 집중하고 그분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분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겼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 절박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직한 우리의 마음과 환경은 바디매오 이야기는 자칫 우리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은 아니고, 이런 특별한 사건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경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바디매오와 같은 간절함이 필요 없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이 비참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은 죽음의 실존을 맞닦뜨리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이 길되시고 진리되시고 생명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믿음은 우리의 실존이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는 바디매오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깨달아질 때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 앞에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얼마나 비참한 처지인지를 아는 것 그것은 은혜요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나올 때마다 깨닫는 것이 있다. 예배 가운데 우리는 나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초라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 심정으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는 심정으로 십자가 앞에 나아온다. 두 손들고 십자가 앞에 나올 때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는 주님의 선포가 한 주간을 은혜의 감격 속에 살아가게 하는 신앙인의 생명의 삶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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