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는 수십 년 간 보따리 장사를 하셨지만 가계를 소유하지 못하셨다. 어릴 적 시장 한 복판에서 좌판을 벌이시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모습, 뜨거운 여름 리어커를 끌고 골목을 다니시는 아버지의 땀 흘린 지친 모습, 명절이 되면 대목을 보신다고 바쁘셨던 모습, 어머니 몰래 한잔 걸치시고 시치미때시는 순진한(?) 장면들이 생각이 난다. 해가 질 무렵이 되면 큰 짐 자전거 뒤에 맛있는 것을 사가지고 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곤 했다. 비록 싱싱한 과일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흠뻑 먹을 수 있는 가난한 시절의 풍성한 기억이었다. 아버지는 아침이 되면 자전거를 끌고 장에 가시는 이 일을 중간에 한 번도 바꾸지 않으셨다. 거의 30여년, 어릴 적 아이가 바라보았던 아버지는 이 일을 좋아하셨던 것처럼 느껴진다. 아버지는 자신의 직업을 거룩한 일로 생각하신 것 같다. 거기에는 자식들을 포기하지 않는 희생적 사랑과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남편으로서의 정직함이 있었다. 아버지가 끌고 다니셨던 자건거와 리어커 그리고 큰 보따리들...모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도구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신앙적으로 나의 삶을 해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묻어있는 흔적들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다. 나는 아버지의 일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영적인 것임을 인정하고 싶다. 어쩔 수 없이 죄의 댓가로 힘들게 일하는 노동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노동을 축복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엄마가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과 설교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지금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고 성도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목사로서 내가 지금 하는 일만 거룩하고 영적인 일이라 생각지 않는다. 내 아버지의 일과 주의 종으로 헌신한 내가 하는 일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중략) 70대 중반이 되셨지만 아직 10년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버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을 기쁜 마음으로 작은 일이지만 최선을 다해 맡겨진 일 즉 사명을 감당하고 계신 것이다. 지금은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흐뭇해지고 자랑스러워진다. (중략)
이 할아버지의 소명의 삶을 어릴 적부터 보았던 할아버지 손녀의 글을 읽어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제목을 붙여 보았는데 “시장표 양말”
아침에 테이블위에 놓여 있는 아기 양말을 자연스레 손에 집어 소파에 앉았다. 두 손에 가지런히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메이커도 아니고 예쁜 캐릭터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였다. 한 해 두 번 돌아오는 명절에 나는 거르지 않고 선물을 받고 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초등학생 때부터라 한다 해도 지금까지 20여년을 변함없이 받고 있다. 바로 시장표 양말이다. 87세에 나의 할아버지는 지금도 보따리를 풀고 양말을 파신다. 용문동 사거리 그 번잡한 도시 한 가운데서 말이다.
명절에 어김없이 각 가정별로 나누어 돌아간다. 메이커를 원하는 자녀도 있을 것이고 최신 유행에 맞는 디자인을 원하는 자녀도 있을 것이다. 조금더 좋은 질을 원하는 자녀도 있을터이나 적어도 내가 봐온 20여년 늘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그리고 이번 추석엔 참석하지 못하여 부모님을 통해 받았다. 거기엔 할아버지의 기쁨을 담은 아기 양말이 하나 더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내 것을 줄 수 있다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 없음을 안다. 사람함에도 나눌 수 없는 고통을 지니고 사는 이들의 마음도 안다. 아직도 건강하시어 사랑하는 자손들을 하나 둘씩 헤어리면서 봉투에 담아 내셨을 할아버지의 인자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이 소식을 전하며 고맙다 늘 기도했다 하시던 할아버지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생각하시며 기뻐하시며 미영이네 봉투에 하나를 더 넣으셨을 것이다. 할아버지도 알고 계실 것이다. 명절 보따리가 풀어질 횟수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할아버지의 시장표 양말은 적어도 우리에게 특별하다. 삶이고 노래이고 기쁨이고 자랑이고기도의 열매이리라 내년 설에는 어떤 양말을 주실까?...기대해본다.
*제 아버지는 설날 명절에 마지막 시장표 양말을 가정별로 나누어 주시고 하늘 나라,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참 지혜롭고 자애로우신 분이셨습니다. 제가 상담을 공부했지만, 저희 아버지는 최고의 위로자, 상담자였습니다. 명절때마다 자녀들, 손자 손녀들에게 전해주시는 한마디, 한마디가 꼭 그 사람에게 필요했던 위로와 소망의 말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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